정치

고려 공민왕의 개혁과 성도착증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요?

웅이 엄마랍니다~ 2022. 2. 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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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공민왕에겐 반원 정책으로 쌍성 총관부를 탈환하고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 전민 변정 도감을 설치해 농민에게 토지를 돌려주며 노비에서 양인으로 신원을 회복시켜준 개혁 군주의 이미지가 있다.

또한 인생 후반부에 변태성욕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선 건국을 위한 명분을 위해 억지로 꾸며낸 고려사의 왜곡인가..

*고려의 25대 충렬왕부터 이어진 6명의 왕들의 이름이 충(忠) 자로 시작되는 건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31대 공민왕부터 없어졌다.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공민왕이 반원 자주 정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성계, 정도전 등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공민왕이 즐겼다는 관음증은 Peeping Tom 이라고도 한다. 11세기 초 영국의 백작부인이 나체로 말을 타고 돌아다녔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공민왕의 성적인 정신 이상증세를 100% 신뢰할 수 있을까..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공민왕은 반원 정책으로 쌍성 총 관부 탈환 등 무인의 기질이 많았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있어서 그림과 서예에 능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전해지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산대렵도와 염제신 초상화등이 대표작이지요. 초상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작품 속 인물의 감정이 묘하게 전해져 옵니다.

공민왕은 역대 왕들이 좋아했던 사냥을 하지 않았고 말조차 타지 않았어요. 원에서 홍건적들이 고려로 쳐들어와 공민왕이 잠시 남쪽으로 피신을 간 적이 있는데 말을 탈 줄 몰라서 왕비인 노국공주가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예술적인 감성이 오히려 공민왕을 성도착증이라는 병까지 이르게 했을까...
그에겐 반원 정책으로 영토를 수복한 호인 기질의 왕과 인생 후반부에 변태성욕을 즐겼다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을 위한 명분 때문에 만들어진 고려사의 왜곡 일까요?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자신이 멸망시킨 고려의 군주인 공민왕을 종묘에 사당까지 만들어 주면서 까지 왜 그를 존중해 주었는지요.

<천산대렵도>

이 그림은 ( ) 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고려의 왕으로 쌍성 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반원 정책을 펼쳤습니다.

1. 성왕 2. 공민왕 3. 진흥왕 4. 근초고왕

31대 공민왕,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32대 우왕, 33대 창왕, 34대 공양왕을 끝으로 고려사는 막을 내린다.

통치자로서 실질적인 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민왕이었다. 나머지 왕들은 이름만 올렸을 뿐 이성계 일파의 허수아비였다.

공민왕은 격동의 시대에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한자 사전을 보면 파란만장 (波瀾萬丈)이란 다음과 같다.

「파도(波濤)의 물결치는 것이 만장(萬丈)의 길이나 된다.」는 뜻으로, 「일의 진행(進行)에 변화(變化)가 심(甚)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로 쓰임.

공민왕에 대해 알아보기 전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자.

1206 >>
칭기스칸 몽골제국 통일

1231~1259 >>
몽골의 고려 침공 (고려 항전)

1260 >>
쿠빌라이 집권 (칭기스칸의 손자)

1271>>
쿠빌라이, 원으로 나라 이름 바꿈

1368 명나라에 멸망

세계 최고의 기마병을 앞세운 몽골(원)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정복한 나라였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 천도 (1232년), 개경 환도 (1270년)등 몸살을 앓았다.

삼별초의 마지막 저항은 1273년까지 있었으나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의 대몽항쟁 (1231 ~ 1259) >> 몽골(원) 간섭기 (1259 ~ 1356 ),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성공할 때까지 무려 125년간 몽골과의 전쟁 또는 영향력에 온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흔들렸다.

' 휴우 ~ '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1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민초들의 처참했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몽골군이 다녀간 마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들은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잔혹한 학살을 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시민들까지 저항하는 자들은 ' 씨를 말렸다. ' 밥을 먹다가도 참수를 하며 또다시 사람의 목을 친 후 식사를 하는 등 살육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필자는 제주도에서 자칭 몽골의 후예라는 중국인들이 말과 함께 하는 관광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놀라웠다. 지금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과 함께 한다는 그들의 말 다루는 기술은 대단했다. 서커스가 아니라 말과 사람이 한 몸이 된 듯했다.

잘 훈련된 기병을 보유했던 몽골군이 저렇듯 말을 잘 다루며 무자비한 학살을 했다고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고려왕들의 역사 연보를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던 일이 있다. 25대부터 충자로 시작되는 왕들이 31대 공양왕 앞까지 연이어 6명이다. 이는 원 간섭기의 고려 왕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왕의 이름 앞에 충 (忠) 자를 붙인 건 원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원은 고려의 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네 마음대로 바꿨다.

공민왕은 (1330 ~ 1374 ) 이런 시대 속에서 살았다. 원 간섭기의 고려왕들이 그랬듯 그도 왕이 되기 이전 10여 년을 원나라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원나라에 있을 때 그는 막강했던 원나라가 망해 간다는 걸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공민왕은 개혁을 통한 반원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원의 연호와 관제 사용을 폐지, 풍속인 변발을 전면 중지시켰다. 친원파 무리를 과감히 제거했다.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를 선발해 이들을 키웠다.

가장 큰 건 쌍성 총관부를 무력으로 공격해 함락시킨 사건이다. 원 간섭기 무려 100여 년 동안 고려를 내정간섭했던 원의 통치기구를 없애 버리고 옛 영토를 수복했다. 이과정에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공을 세우며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역사에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반원 정책을 쓰는 과정에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정도전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나라의 힘을 믿고 세력을 키운 권문세족들은 그의 개혁을 좋아할 리가 없다. 공민왕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왕후인 노국공주마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을 때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만나 위안을 얻고 그에게 개혁정치를 맡긴다.

훗날 신돈은 개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적들이 많이 생겼고 공민왕마저 신돈을 믿지 못해 반역죄로 처형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공민왕과 함께 이뤄낸 전민 변정 도감은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전민 변정 도감은 (田民辨整)이라는 한자에도 잘 나와있듯 토지나 농민을 바로잡기 위해 설치된 임시기구였다.
불법으로 빼앗긴 땅을 되돌려 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양인들을 원래 신분으로 돌려줬다.

하지만 결국 이 임시기구도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개혁을 추진하던 신돈이 거만해져 역모죄로 죽자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자, 그럼 여기까지.. 반원 정책과 전민 변정 도감 등 개혁정치에 성공해 왕권강화를 이룬 공민왕은 동성애와 성도착증 증세를 보인다. 결국 왕의 호위무사는 뇌수가 터져 벽에 묻을 정도로
잔인하게 공민왕을 살해한다.

왕스스로가 여인으로 분장하고 상대 남성으로부터 농락당하는 걸 허락하며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지켜보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다. 영화 ' 쌍화점 ' 의 소재로도 쓰였던 이 일화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공민왕에게 있었다는 관음증을 Peeping Tom이라고도 한다. 11세기 초 영국의 백작 부인이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기 위해서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돈 일이 있었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 영지 사람들은 문을 잠그고 일부러 그녀를 보지 않았지만 톰이라는 사람이 몰래 훔쳐보았다는데서 유래했다.

반원 정책과 전민 변정 도감 <---> 변태성욕자, 성도착증 환자, 일각에선 왕비 (노국공주)를 잃고 개혁정치에 실패한 나머지 살해당할 위협을 달고 살아야 하는 처지에서 마음의 병이 들어 공민왕이 이렇게 변했다고 하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마무리 글>

고려사에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서 고려 말 공민왕이 보인 정신이상 증세를 100% 신뢰할 수 있을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수차례 고쳐졌다고 하니 고려 왕국을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승자들의 왜곡이 아닌가 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 볼 수 있다.

정치와 역사는 정당화라는 명분이 필요하다. 가까운 현대사의 5.16 쿠데타와 (박정희) 12.12 (전두환)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어제 일어난 정치적 사건조차 오늘 아침이면 왜곡이 의심되는 상황인데 하물며 고려 시대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 참고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기출문제
http://tok.historyexam.go.kr/mo/exam.html?grade=5&req=39&type=case

*한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295

*[배한철의 한국 초상화 톺아보기] 평생 여자 멀리하며 예술가적 삶 추구했던 고려 공민왕. 2016.12.05 매일 경제 기사

https://m.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6/12/84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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