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버지의 후궁을 젓갈로 담아 뿌리다니, 싸이코의 극치였던 연산군.

웅이 엄마랍니다~ 2022. 2. 1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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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서 유래된 ' 흥청망청(興淸亡淸) '  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상황이 그려지는가..

한자 그대로를 풀어본다. 일어날 흥, 맑을 청, 망할 망, 맑을 청이다. 맑은 기운이 일어나고 망하다. 돈을 ' 흥청망청 쓰다 '처럼 뭔가를 낭비하며 마음대로 쓰는 걸 뜻한다.

' 흥청 ' 이란 연산군 시절 기생의 명칭이다. 연산군은 채홍사라는 관리를 파견해 지방에서 미모가 뛰어난 처녀들을 궁궐로 데려 오게 했다. 그 숫자는 만 명에 가까웠고 그들 중 미모, 춤, 노래가 뛰어난 이들을 흥청이라 불렀다.

상상을 해보자. 서울 경복궁에 가면 경회루가 있다.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둘러 쌓여 아름 다운 연못 위에 놓인 이곳에서 연산군은 기생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잔치를 벌였다.

그 기생들 중 연산군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은 여인이 장녹수다.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 귀에 익숙한 그녀의 이름이다. 연산군의 총애를 배경으로 온갖 악행을 일삼다가 중종반정 때 참형에 처해진다.

조선의 10대 임금인 연산군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해 실록에서도 연산군일기로 기록되었다.

그는 1476 ~ 1506 ( 30세 )를 살았고 1494 ~ 1506 ( 12년 )을 왕위에 있었다.

역사는 등장인물과 여러 사건들이 얽혀서 어렵게 느껴지지만 흐름을 알면 쉬워진다.
연산군 시대를 한눈에 정리해본다.

성종 (아버지) - 폐비 윤 씨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연산군이다. 즉위 후 어머니 윤 씨가 폐비가 된 과정을 알고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다. 망나니 같은 왕권을 휘둘렀다.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 왕에서 쫓겨나 (중종반정) 강화도 유배 중 사망했다.

19살에 왕위에 오름 -> 무오사화 -> 어머니 죽음에 대한 복수심 -> 갑자사화 -> 폭정 -> 중종반정 -> 강화도 유배 -> 사망. 이런 흐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폭군이 되었던 건 아니다. 왕위에 오른 과정도 무난했고 초기 그의 집권은 평탄했다.

그러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사망 사건을 듣게 된 후 연산군은 변하기 시작한다. 왕실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술수가 난무한 갈등 속에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 했다는 사실을 안 그는 복수의 칼날을 준비하고 실행한다.
이과정이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이어진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방치된 폐비 윤 씨의 능묘 천장(遷葬) 문제를 두고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싸우게 된다.

*능묘 천장 :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
*삼사 : 권력을 감시하는 기관.

자신이 죽은 후 100년 동안 폐비 문제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당부했던 성종의 유언이 있었기에 관료들과 연산군은 대립한다.

내가 왕이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 그래, 힘을 키워야겠구나.
저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선 강한 왕권이 필요하겠지. '


- 무오사화 -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 4)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처형시키고 귀향 보낸 사건이다.
오늘날 서로 싸우는 민주당과 국민의 힘을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대립은 구세력과 신진 사류의 싸움이다. 성종 때 훈구파의 부정부패와 폐단을 막기 위해 등장한 사림은
3사의 관직과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했다.
사림파는 훈구파와 왕을 지켜보고 권력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의 제문(弔義帝文)을 구실로 삼아 훈구파는 사림을 핍박했다. 연산군도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 사림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했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연산군이 권력 강화를 위해 사림파를 죽이고 유배시킨 거다.

- 갑자사화 -

다음은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 4)에서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 10)로 가보자.
이때 연산군은 7개월에 걸쳐 폐비 윤 씨에 관련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실록의 연산군일기에 근거해 몇 가지 일화가 있다. 그중엔 인간이 아닌 악마의 모습으로 변한 폭군 연산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의 기록이다. 아래에 링크를 걸어둔다.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약을 받게 된 건 성종(아버지)의 두 후궁 엄 씨와 정 씨 인수대비(할머니) 때문이라 여겼다.

그날 엄 씨와 정 씨 (연산군의 계모)를 잡아다가 묶어 놓고 모질게 짓밟은 후 성에 차지 않아 항과봉(계모의 아들)을 불러 제 어머니를 직접 때리게 했다.

이후 두 아들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인수대비(할머니)를 찾아가 욕을 하며  '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 물었다.

또한 뒤에 내수사를 시켜 엄 씨, 정 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갈을 담아 산과 들에 뿌렸다. 사람을 젓갈로 만들었다고 하니 희대의 사이코패스라 해도 무방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3020_005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sillok.history.go.kr

두 번째 연산군일기 10년 5월 11일의 기록이다. 의금부에서 왕에게 보고를 한다. 청주에 내려가 관을 가르고 한명회의 머리를 베어 왔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죄명을 써서 저자에 효수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른바 죽은 사람을 꺼내어 다시 한번 죽이는 부관참시를 했다.

갑자사화로 인해 239명이 죽었고 그중 절반인 122명이 부관참시를 당했다.

무오사화가 왕권강화를 위한 숙청이었다면 갑자사화는 폐비 윤 씨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은 이 두 사건을 연산군 혼자서 했을 리 없다. 대신들의 세력 다툼과 연산군의 심리를 이용해 권세를 누리려는 임사홍 같은 인물이 부추겨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

연산군은 무엇 때문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폭정과 향락을 일삼은 걸까. 드라마에 나온 장면을 떠올려 본다. 폐비 윤 씨가 피를 토하며 남긴 저고리를 받아 든 아들 연산군의 심정을 잠시 생각해보자.

연산군은 시를 잘 짓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무언가 천재성을 타고난 이들은 마음 깊숙이 광기(狂氣)가 있는 듯하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시 방학동 도봉구에 있다. 폐위된 왕이기에 능으로 조성하지 않았다.

그의 무덤 주변에는 수령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방학동 은행나무로 유명하다. 이 나무는 나라의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불이 났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1년 전에도 불이 나서 소방차가 동원됐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는 묵묵히 연산군을 바라보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 온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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