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하루 아침에 급사한 예종, 남이장군의 이름을 딴 남이섬

웅이 엄마랍니다~ 2022. 2. 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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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은 짧은 생애(만 20세)를 살았고  13개월의 재위기간을 지낸 왕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 임금님의 사건 수첩을 기억하는가.. 만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예종 역할에 이선균, 신입 사관은 응답하라  1988의 안재홍이 나온다.

2017년 개봉된 영화다.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예종은 단순히 재미로만 볼뿐 역사속의 왕과 비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사극에서 만든 설정일 뿐이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인 의경세자 (훗날 성종의 아버지)가 20세의 나이로 단명을 하자 왕위를 승계받았다.

세조의 첫째와 둘째 아들과 본인은 모두 업보 때문인지 오래 살지 못했다. 물론 그 이후의 왕들 또한 평탄하지 않았다.

세조 (세종의 둘째 아들), 의경세자 (세조의 맏아들) - 단명, 예종 (세조의 둘째 아들) - 단명, 성종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조금 복잡하지만 계보는 이렇게 이어진다.

예종은 승하하기 얼마전 족질로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날까지 아무 이상 징후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급사를 했다. 발에 난 병 때문에 급성 패혈증으로 사망을 했는지, 한명회, 신숙주 등이 ' 독살 '을 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공신 세력인 훈구파는 능히 그럴만 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정치적 배경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예종과 동시대를 살면서 역모죄로 몰려 죽은 남이 장군이 있다. 그는 남이섬 때문에 유명해졌다. 27세로 생을 (1441∼1468)마감했다. 예종이 1450년생이니 9살 차이다.

5월, 이맘때쯤 남이섬을 가면 푸릇푸릇한 나무들을 보며 산뜻한 강바람을 즐길 수 있다. 남이 나루에 내려 왼쪽으로 남이 장군의 묘가 보인다. 원래는 돌무더기 무덤의 가묘였으나 섬을 유원지로 개발하면서 봉분을 만들어 관리를 하고 있다.

가묘란 정식으로 묘를 만들기전에 임시로 쓰는 묘를 말한다. 조선 시대는 역적으로 처형된 사람의 묘를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실제 묘를 지키기 위해 가묘를 만들었다.

남이섬의 무덤은 가묘이긴 하지만 이 돌무더기의 돌을 함부로 가져가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남이 장군의 묘는 2곳이 있다. 다른 하나는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번지에 있다. 실제로는 어디에 묻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예종 재위 13개월 동안(1468~1469)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 남이의 역모 사건 '이다. 이 사건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  이시애의 난 '을 보자.

1467년(세조 13)에 북방출신들을 등한시하는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지방의 호족 이시애는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새로 세우려 했다. 이때 구성군(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아들)과 남이장군이 공을 세워서 진압을 했다.

남이의 어머니는 태종(이방원)의 넷째 딸인 정선 공주였다. 왕실의 외가 출신인 남이는 18세에 무과를 급제하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문과나 무과의 평균 급제 나이는 30세 전후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남들보다 뛰어난 인재들은 주위의 시기를 받는다. 결국 모략을 당해 남이는 역모죄로 능지처참 형을 당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이를 본 남이는 동료 관리들과 함께 있다가 ' 혜성이 나타난 것은 옛것이 지나가고 새로움이 다가올 징조 '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함께 있던 유자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시애의 난을 남이와 함께 평정을 해서 공을 인정받았지만 서자 태생으로 매번 출세에 제약을 받았다.

다음 날 유자광은 한명회를 찾아갔다. 이 말을 들은 한명회는 쾌재를 불렀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새롭게 등장한 남이 장군 같은 신진 세력을 견제하고 있던 터에 ' 역모 프레임 '을 걸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던 거다.

나이 30이 되기도 전에 병조판서를 하고 있던 남이 장군은 예종의 질투도 함께 받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자신과 세조의 총애를 받던 남이와 늘 비교가 되었다.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모진 고문에 자포자기한 남이는 역모를 시인하며 거열형에 처해진다.

먼 훗날, 순조 때 남이의 후손인 영의정 남공철이 모략이었음을 올리는 상소로 신원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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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의 묘 두 곳을 지도로 가보자.

또한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 안에 있다.

그의  부인인은 한명회의 딸인 한 씨였으나 아들을 낳은 후 바로 사망했다.
예종은 12세(초등 5학년)에 낳은 아들마저 하늘로 곧 보내야 했다.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야 했으나 한명회 등의 훈구 세력은 세조의 맏이 의경세자의 아들을 다음 왕으로 추대한다. 그가 바로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9대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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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장군 묘

조선 세조 때의 무신 남이의 묘. 경기도 기념물이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2단으로 쌓인 석축대 위에 있다. 사성(莎城)에 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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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

1467년(세조 13)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역사적 배경]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土班)이었다.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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