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다음 정차역은 선릉역 입니다. 선릉은 연산군의 아버지 능이죠.

웅이 엄마랍니다~ 2022. 2. 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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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제9대 왕인 성종은
1457 ~ 1494 (37세)를 살았고 1469년 ~ 1494년(25년)을 재위했다.

실록에 의하면 성종 역시 배꼽 밑에 난 종기가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현대 의학에서 종기는 째고 항생제로 치료하면 금방 낫는다.

그때는 약도 없었을뿐더러 왕의 몸에 함부로 칼을 댈 수 없었으니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었나 보다. 왕실에는 분명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어의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성종의 능은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에 있다. 유명한 동네가 보인다. 대치동, 청담동, 역삼동.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다가 자주 듣던 선릉역. 맞다. 그분의 능이다.

성종 재위 기간 중 여인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 두 가지를 살펴보자. 폐비 윤 씨 (연산군의 어머니) 이야기와 어우동의 문란한 성생활이다. 쓰다보니 좀 길어졌다. 읽다가 지루하다면  뒷편 어우동 이야기를 먼저 보시길 바란다. 흥미로운 일화들이 있다.

- 사약을 받은 폐비 윤 씨 사건 -

먼저 폐비 윤 씨 사건은 간단히 말하자면 중전이 된 윤 씨가 성종과 다른 후궁들 사이의 관계를 질투를 했고 그 정도가 너무 심해 결국 성종이 사약을 내린 일이다.

성종은 낮에는 열심히 정사를 돌보고 밤은 유희를 즐겼다고 한다. 하루에 3번 할 정도로 조선의 왕들 중 가장 많은 경연( 신하들과 토론)을 했다. 또한 그는 12명의 부인과 28명의 자녀가 있었다.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확실히 놀았던 셈이다. 성병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 (이방원) 역시 많은 후궁이 있었는데 정실부인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많은 후궁과 밤마다 함께 지내는 걸 보는  중전 윤 씨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자로서 시기할 만도 하다. 하지만 왕이라는 위치의 특성상 정략결혼도 필요했을 것이고 넘치는 성욕 또한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있었을 거다.

성군인 세종도 성종처럼 후궁과 자식들이 많았다. 그러나 왕비 소헌왕후와 세종은 금실이 좋았고 후궁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세종은 후궁을 들이는데 별문제가 없었다. 성종은 아들 연산군까지 이어지도록 잡음이 많았다. 두 임금의 차이점은 뭘까..

세종과 정실부인이 사이가 좋았던 이유는 세종이 그만큼 정실부인에 대한 배려를 했을 거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배려를 통해 표현된다. 왕비를 존중했기에 그녀는 자존감을 잃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반면 성종은 후궁 문제를 놓고 크게 싸우는 일화가 있다. 중전이 후궁의 머리채와 멱살을 잡고 다투다가 이를 말리는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는지 증거는 없지만 야사로 전해진다.

실록의 기록에는 성종이 그녀의 빰을 때렸다는 문구가 있다.

' 주상이 나의 뺨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집에 나가서 내 여생을 편안하게 살겠다고 하였는데... '

       - 성종 10년 6월 5일 -

아버지 (성종)는 어머니를 죽였고 아들(연산군)은 그로 인해 복수의 칼날을 휘둘러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사건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잠깐, 성종은 세종과 달리 왜 중전 윤 씨를 그 지경까지 만들었을까. 다음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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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씨는 평소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매사에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고, 자신이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말을 듣자 "저는 본디 덕이 없고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더 그녀를 현숙하게 여긴다.

- 성종실록 7년 7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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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씨는 검소한 성품에 예의 바른 인물로 실록에 나온다. 중전으로 간택될 시기에 좋은 평이 있었던 윤 씨가 사사를 당할 만큼 변해 버린 건 성종 또한 책임이 있다.

앞서 세종은 부인에 대한 사랑을 배려로 표현했었기에 후궁들과 갈등이 없지 않았을까 필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성종은 아마도 적장자를 낳았음에도 윤 씨를 무시하고 소홀히 대했기 때문에 성격장애까지 이르게 되지 않았나 싶다.

폐비 윤 씨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온 친정의 배경에 대한 콤플렉스, 인수대비와의 고부 갈등, 연산군을 낳은 후에 찾아온 산후 우울증, 심지어는 윤 씨가 낳은 아들이 성종의 자식이 아니었다는 등등. 상상은 자유다.

다른 후궁들과 비교하면 집안 배경이 형편없었던 윤 씨는 언제든 버림 당할 수 있겠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이런 환경에 놓인 윤 씨를 좀 더 아껴주고 보듬어 줬어야 했는데 성종은 이점이 부족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훗날 연산군이 '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다 '고 하자 곁에 있던 신하가  ' 주상, 그리 보고 싶으시면 거울을 보십시오. '라고 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아 꽃미남이었다고 하며 폐비 윤 씨 또한 미모가 출중했다고 전한다.

사실 별 볼 일 없는 윤 씨의 집안의 배경으로 중전이 될 수 있었던 건 미인이었던 윤 씨의 외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다음 두 번째 사건을 알아보자.

- 조선 최대의 성(sex) 스캔들 어우동 -

영화 어우동, 개봉 : 1985.09.28.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이때의 나는 중학생이었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하던 시절 이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 방문을 잠그고 친구들과 함께 보며 침을 ' 꿀~떡 ' 넘겼다. 어우동 역할의 이보희는 제22회 백상 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 했다.

어우동(於宇同)이란 ' 같이 어울려서 통하다. '라는 뜻이다. 성종 시대에 이 여인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여러 남자들과 성관계를 했다.

1440년경 충북 음성에서 태어 난 그녀는 양반 집안에서 성장했다. 왕손과 혼인을 했는데 다른 남자와 간통을 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남편은 아내를 내쫓았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그녀의 행실은 과연 모함을 받았는지 의심스럽다. 어우동은 소박을 맞은 이때부터 왕족, 양반, 양인, 노비를 가리지 않고 간통을 했다.

대동야승이라는 야사를 모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실은 알 수 없으나 떠도는 이야기를 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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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예쁜 소년을 끌어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 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누구는 나이가 젊고 누구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누구는 내가 맡고 누구는 네게 주리라" 하여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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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오륜을 중요시했던 시절에 어우동의 간통 사건은 실록에 기록될 만큼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와 성관계를 한 남자들 중에는 벼슬이 높은 양반들과 그의 자식들, 서로 사촌관계인 왕족들까지 연루되었다. 이둘중 한 명이 신고를 해서 결국 어우동은 여종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SBS의 대하드라마 ' 왕과 나 ' 에서 성종과의 밀애를 나누는 스토리가 있는데 지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 다만 어우동과 정을 나눈 남자들 중 이 씨 성을 가진 사람 때문에 추측했다 한다.

어우동의 사후 일어난 집안 내력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녀의 오빠 박성근이 어머니 정귀덕을 살해한 패륜 범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들여다보니 사연 참 드라마틱하다.
어우동의 오빠 박성근이 어렸을 때 어머니 정귀덕의 불륜을 목격했나 보다.

박성근은 ' 어미가 잠을 자는데 이상하게도 발이 네 개였다. '라는 말을 했다가 어머니에게 심한 학대와 차별을 받았다. 또한 어머니 박귀덕은 문란한 성생활을 했던 딸인 어우동을 나무라기는커녕 비호했다.

이런 어머니에게서 견디다 못해 외사촌과 모의를 하고 종을 시켜 그녀를 죽이도록 사주했다. 야사에 나올법한 스토리지만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성종시대에 일어난 두 여인의 이야기를 구성해봤다. 성종은 세종에 못지않게 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왕비와의 갈등으로 그 치적이 빛바래진 면이 있다.

실록에 기록되지도 않고 떠도는 야사에서도 전해지지 않는 성종과 폐비 윤 씨와의 관계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랬을 거야. 추측만 할 뿐. 남, 녀 관계가 어디 그렇게 마냥 행복하고 쉽기만 하겠는가.  

어쨌든 아버지는 아들의 어머니를 사사 ( 賜死  )했다. 아들은 분노의 적개심에 불탄다. 이어지는 연산군 시대 ' 피바람 ' 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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